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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강은공휘연우묘갈명(江隱公諱淵宇墓碣銘)
江隱公諱淵宇墓碣銘 趙氏之籍玉川而居順天者世有名行爲鄉之望其居雙巖坊之江村而自署以江隱者曰諱淵宇初諱允植字元載亦以行義之篤能繼其家傳而有稱鄉里其生以 高宗庚寅二月十九日卒以六十四之癸巳八月二十八日葬江村道理峰 原配全州李氏讓寧大君之后顯秀女生先公一年歿後公四年祔以雙兆東琳東夏其二男也甲勲乙勲昇容三孫也後三十餘年其次子東夏以其族東貴所述狀偕其族弟從余學者東永遠來求余表其阡余癃癈固辭而其懇甚至且東永從傍亟道君誠意之篤余感其誠不能辭按趙氏乙先肇自高麗檢校大將軍璋三傳至元吉號農隱以勲封玉川君鎰忠獻是生瑜號虔谷典農副正麗亡守義累徵不就世所稱杜門諸賢之一也享謙川祠其後有若蔭察訪相好亭智崙篤友之行 贈户曹佐郎梅窓處士大成隱淪之德進士 贈户曹佐郎遵晦時一丙子倡義之蹟俱著稱於世高祖曰禮淳曾祖曰在益祖曰昌錫號二既軒考曰洙薰號晦雲世有聞望連三世主任黌舍而晦雲公手植杏樹爲鄉人所愛保且甞出題試士皷發抗日之思爲彼虜所詰拘囚犴狴者數月始終不屈爲人所稱妣濟州梁氏參軍斗煥女繼妣慶州鄭氏在奎女公承襲先範禀清秀忠信之姿自幼從學家庭識解日透文藝夙就筆法亦精妙爲人所愛玩篤於孝友事二親極其愛敬深得其歡與諸弟友愛尤至怡怡無間推之於睦族交友莫不各盡其誠而和氣藹然當大人公之拘辱也傾盡家資竭力救護者始終不懈至於前後侍疾居喪無不極其憂哀而誠無或闕鄉里一辭稱其孝平居未甞以產業經心而所致力者惟奉先之孝也所盡心者惟貽後之謨也是其行義篤豈非庶無愧於古之躬行君子者耶是可銘銘曰 宗族稱孝 鄉党稱弟 聖人言士 以是爲次 求公於是 殆可無愧 吁嗟江隱 衰世善士 歲甲子早秋 花山 權龍鉉 撰 강은공휘연우묘갈명(江隱公諱淵宇墓碣銘) 순창 조씨로 순천에 사는 사람들은 대대로 명사(名士)가 많아 고을의 중망(重望)을 받는다. 그중에도 쌍암(雙巖) 강촌(江村)에 살면서 스스로 강은(江隱)이라 호한 사람은 휘가 연우인데 처음 이름은 윤식(允植), 자가 원재(元載)이다. 공 역시 행의(行義)가 독실하여 조상의 업적을 이어서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다. 공은 고종 경인년(一八九○) 二월 十九일에 출생하여 六十四세 되던 계사년 八월 二十八일에 졸하니, 강촌 도리봉(島利峰) 좌 언덕에 장사하였다. 부인 전주 이씨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현수(顯秀)의 따님인데 공보다 一년 앞서 출생하여 공보다 四년 늦게 졸하여 쌍봉으로 장사하였다. 동립(東琳)·동하(東夏)는 두 아들이며 갑훈(甲勲)·을훈(乙勲)·승용(昇容)은 세 손자이다. 공이 졸한지 三十여년이 지나서 그의 둘째아들 동하가 그의 일가 동귀(東貴)씨가 쓴 행장을 가지고는 나에게 글을 배운 성원(盛元)과 함께 멀리 찾아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의 간청이 지극하고 또 성원이 옆에서 동하씨의 독실한 성의를 자꾸 일컬으므로 나도 정성에 감동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다. 상고하건대 조씨의 시조는 고려 검교 대장군 장(璋)인데 三대를 지나 휘 원길은 호가 농은으로 공이 있어 옥천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헌공이다. 이분이 휘 유를 낳았는데, 호가 건곡으로 전농시 부정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여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아 이른바 세상에서 칭하는 두문동(杜門洞) 현인(賢人) 가운데 한분이며 겸천사에 향사한다. 그후에도 음보(蔭補) 찰방인 상호정 지륜은 우애가 돈독하였고, 호조 좌랑에 추증된 매창처사(梅窓處士) 대성(大成)은 숨은 덕이 있었으며 진사(進士)로 호조 좌랑에 추증된 준회(遵晦) 시일(時一)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사적들이 있어 세상에서 일컫는다. 고조는 예순(禮淳)이며, 증조는 재익(在益), 조 창석(昌錫)은 호가 이기헌(二既軒) 이다. 고(考) 영훈(泳薰)은 호가 회운(晦雲)인데 대대로 명망이 있어 삼세를 잇달아 향교(鄉校)의 책임을 맡았는데 회운공은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어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아끼며 보존하고 있다. 또 일찌기 선비를 시험 보일때 항일(抗日)하는 뜻으로 출제(出題)하여 왜경(倭警)에게 구속되어 여러 달 동안 옥고를 치루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아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어머니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참군(參軍) 두환(斗煥)의 따님이며 계비(繼妣)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재규(在奎)의 따님이다. 공은 조상의 법도를 이어받고 성품이 청수하고 충신(忠信)의 자품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정 교육을 받아 지식이 날로 투철해지고 문예(文藝)가 일찍 성취되었고 필법(筆法) 역시 정묘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효도와 우애심이 돈독해 부모님을 정성껏 모셔 기쁘게 해드렸고, 여러 동생들과 우애 역시 지극하여 화락함이 조금의 틈도 없었다. 또 친척과 화목하고 친구를 사귀는데도 성의를 다하여 화기(和氣)가 애연하였다. 아버지가 구속되었을 때는 가산을 다 없애가면서 힘껏 구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부모의 전후 상에는 우애(憂哀)와 정성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효심을 칭찬하였다. 평소에 가업(家業)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힘을 쓴 바는 선영을 받드는 효였고 또 후손들을 위한 계책에 힘썼다. 이상이 공의 돈독한 행실의 대강인데 옛날 행실이 훌륭했던 군자(君子)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일가들은 효자라 말하고 宗族稱孝 동네에선 우애있다 일컫네 鄉黨稱弟 성인이 말씀한 선비란 聖人言士 이 두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네 以是爲次 공에게서 이걸 구해도 求公於是 조금도 부끄럼 없네 殆可無愧 아아, 강은 공은 吁嗟江隱 말세의 훌륭한 선비였네 衰世善士 갑자년 이른가을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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